개발 칼바람에 죽어나는 세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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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칼바람에 죽어나는 세입자들
  • 석희열 기자
  • 승인 2007.05.28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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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광풍에 철거민 신세... 행정관청은 '나몰라라'

▲ 서울 성수동에 '개발광풍'이 덮치면서 성수1가 1동 521-1번지 일대 1만2000평의 고급 아파트 건설 예정지에 대한 강제집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부 세입자들이 이주를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 이곳 철거작업은 60% 정도 마무리된 상태다.
ⓒ 데일리중앙 석희열
서울숲과 한강이 맞닿아 있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주택가. 마을 곳곳이 폭격을 맞은 듯 깨지고 부서진 건물 잔해들로 넘쳤다. 지은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새 건물 외벽엔 듬성듬성 큰 구멍이 뻥 뚫렸고, 쓰레기 더미에서는 뜯겨나간 문짝들이 나뒹굴었다.

90년대까지 구로동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영세공장 밀집지역으로 생계를 위해 농촌을 떠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곳. 최근 불어 닥친 개발의 칼바람에 폐허가 됐다. 서울숲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입지조건 때문에 '대박'을 꿈꾸는 부동산 투기꾼들의 황금어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에서 투기꾼들의 황금어장으로

2000년 '남경아이종합개발주식회사'가 이 동네 주택을 하나둘씩 사들이면서 재개발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남경아이는 성수1가 1동 521-1번지 일대 1만2000평의 이곳에 초고층 아파트를 세울 계획. 2010년까지 '서울숲 두산위브' 아파트 566가구가 들어설 예정이다.

건설업체의 '먹잇감'이 되면서 2000년 당시 평당 600~700만원 하던 이 지역 땅값이 지금은 네다섯 배까지 치솟았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금싸라기 땅으로 변한 것이다.

서울숲 맞은편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는 김아무개씨는 "서울숲이 조성된 2005년 이후 평당 2000만원 선을 유지하던 땅값이 최근 들어 3000만원에서 최고 350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며 "속된 말로 이곳 땅값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집주인의 95% 이상은 땅을 팔아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고 떠났다. 900여 가구나 되던 세입자들도 철거용역반의 굴착기 소리에 대부분 마을을 떠났다. 텅 빈 마을엔 오갈 데 없는 세입자 40~50가구만이 남아 추위를 견디며 '주거권 보장'을 외치고 있다.

공동시행사인 '성수1지역주택조합'과 남경아이 쪽은 예정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지난달 중단한 철거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부터 헐 계획이지만, 세입자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남경아이 관계자는 "물리적인 충돌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강제집행을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조만간 강제철거를 염두에 둔 말이다.

강제철거 임박... 정면 충돌 우려

희망의 탑 '형편에 맞는 임대주택'을 요구하며 이주를 거부하고 있는 세입자들로 이루어진 성수1지역 세입자대책위는 강제철거 반대와 주거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 최근 대책위 사무실 옥상 위에 지상 20미터 높이의 망루를 세웠다.
ⓒ 데일리중앙 석희열
하지만 성수1지역 세입자대책위원회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다. 최근엔 지상 20미터 높이의 망루를 대책위 사무실 옥상에 세웠다. 결전에 대비해 진지를 구축한 셈이다. 세입자들은 24시간 망루를 지키며 경계를 강화하고 있는 눈치다.

박장수 세입자대책위원장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건설자본의 불법 강제철거를 반드시 실력으로 막겠다"며 "옥상에 망루를 세운 것도 세입자들의 이러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밝혔다.

사정이 이렇듯 급박해지자 관할구청이 뒤늦게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세입자들의 임대주택 요구에 대해 구청은 집주인들이 조합을 만들어 사업을 추진하는 민간개발이라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개인 간 분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이재원 성동구청 건축과 주임은 "재개발 사업이라면 재개발구역 지정 3개월 전에 들어온, 집이 없는 사람에게는 영구임대주택이 주어지지만 성수동처럼 주택법에 의한 지역조합 아파트의 경우에는 세입자들에게 임대아파트를 지급할 규정이 없다"고 말했다.

사람 사는 집 폭력적으로 부숴... 구청·경찰은 구경꾼?

이 주임은 또 사람이 살고 있는 새 집 철거에 대해 "건축법에 의해 7일 전에 멸실신고를 하면 새 집이든 헌 집이든 철거를 별도로 제재하는 규정은 없다"며 "전체적인 지역 개발을 위해 일부 새 건물을 철거하는 사례는 재개발지역 같은 데 보면 많이 있다"고 해명했다.

구청 관계자의 이 같은 해명에 대해 지난 여름 철거용역반에 의해 살고 있던 집이 부서진 세입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시행사가 고용한 철거반은 통상적으로, 빈 집을 헐기 위해 같은 건물에 설사 사람이 살고 있더라도 마구잡이 철거공사를 진행한다.

세입자 이옥자(50)씨는 "철거반이 세든 집(1층)의 2, 3층을 철거하면서 유리창을 일부러 1층 바닥에 박살을 내는 바람에 정말 난리가 아니었다"며 "딸은 그때 충격으로 두 번이나 병원에 실려갔다"고 당시 악몽을 떠올렸다.

이씨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사람 사는 집에 이래도 되느냐'고 했더니 '당신 집만 안 건드리면 된다'고 하더라"며 기막혀했다. 이씨 가족은 당시 철거작업으로 반쯤 부서지고 쓰레기가 쌓여 있는 집에서 지금도 네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

"단결만이 살 길이요 / 세입자가 살 길이요 / 내 하루를 살아도 / 인간답게 살고 싶다 / (중략) / 단결 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세입자"
시행사 쪽은 남아 있는 세입자들의 주거 안전이나 임대아파트 보장에는 별 관심이 없는 분위기다. 임대아파트와 관련해서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며 분명한 선을 그었다. 좁은 택지 위에 임대아파트를 지으면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남경아이 관계자는 "임대아파트는 지을 계획도 없고 더군다나 세입자와의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히고 "대신 세입자들을 상대로 이주비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전세 보증금에다 가구당 500만원 정도 이사 비용을 얹어주겠다는 것이 시행사 쪽의 협상 카드다.

반면 세입자대책위는 이주비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형편에 맞는 맞춤형 임대주택 보장' 이외의 별도 협상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것. 세입자대책위는 그러면서 개발 예정지 안 1212평의 국공유지에 임대아파트를 짓자고 제시했다. 하지만 성동구청은 "508제곱미터를 뺀 나머지 국공유지는 외곽도로로 건설이 불가능한 땅"이라고 설명했다.

투쟁가요 부르는 네 살배기 소녀

이수경 세입자대책위 간사는 "이주비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가족이 함께 오순도순 살 수 있는 주거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큰 돈을 타내기 위해 이주를 거부하고 있다는 일부의 비난을 일축한 것이다.

이 간사는 "지난 1년 동안 싸우는 과정에서 경찰이 자본의 편에 선다든지, 구청이 법을 핑계로 지역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가 커졌다"며 "우리의 싸움은 성수동만의 싸움이 아니라 개발 악법을 뜯어 고치고 사회 공동선을 실현하는 싸움"이라고 말했다.

"단결만이 살 길이요 / 세입자가 살 길이요 / 내 하루를 살아도 / 인간답게 살고 싶다 / (중략) / 단결 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세입자"

인터뷰 도중 이 간사의 네 살배기 딸 해솔이의 입에서 나온 노래다. 이 간사는 해솔이가 세입자대책위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다 보니 동요 대신 투쟁가요를 자연스레 부르는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기사 입력 2007-01-21 23:05

석희열 기자 shyeol@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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