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한동의 '정치는 중업(重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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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한동의 '정치는 중업(重業)이다'
  • 이병익 기자
  • 승인 2018.10.23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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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익(칼럼리스트)
▲ 최근 <정치는 중업이다' 제목의 회고록을 낸 이한동 전 국무총리.
ⓒ 데일리중앙

[데일리중앙 이병익 기자] 33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동 자유한국당 상임고문이 회고록을 발간했다. <정치는 중업(重業)이다>라는 제목이다. 정치는 국사(國事)를 조직하고 이끄는 최고의 업이라는 의미이다. 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6.25동란을 경험했고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장남으로서 어려운 환경에서 학업을 지속하여 고등고시를 거쳐 법조인으로서의 생활과 정치입문과정, 의정활동과 국무총리 재임 시의 활동 등을 소상히 기술하고 정치인으로서의 소회와 당부를 담담하게 서술했다.

정치인의 회고록은 정치적인 기술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여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간하는 경우가 많다. 세월을 거치면서 자신의 합리화나 변명 등을 나열하여 여론의 지탄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한동의 회고록은 특정 정치를 옹호하거나 편향성을 노출하는 회고록과는 결이 다른 객관적 사실과 자신의 바람을 표출하고 있으며 국민통합과 포용의 정치를 주문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보수우파의 정치인으로서 극단적이지 않고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의회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회고록은 마지막으로 개헌에 관한 방향과 주장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적 개헌을 소망하면서 회고록은 끝을 맺는다.

이한동은 김대중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당시 새천년 민주당은 자유민주연합과 선거공조를 통하여 집권한 공동정부였다. 공동정부는 국무총리직은 자유민주연합에서 차지하게 되었고 김종필, 박태준에 이어 이한동 국무총리의 시대를 열었다. 이한동 국무총리는 최초의 인사청문회를 거쳤다. 당시 정치적 친정인 한나라당의 집요한 반대와 공격을 극복하고 공동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재임기간은 2년2개월 이었다. 역대 어느 국무총리보다도 오랫동안 총리로 재임하였다. 한 러 총리회담을 위해 러시아를 국빈 방문했으며 중동 4개국 국빈방문동안 세일즈 외교로 433억 달러의 수주를 기록했다. 몽골에 IT센타 건설지원을 약속하고 중국에는 CDMA기술로 500억달러 규모의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56차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통하여 반테러연대 지지입장을 밝히고 대북포용정책을 설명하기도 했다.

국내적으로는 그가 재임하는 동안 인천국제공항이 개항되었고 제주국제자유도시를 추진하였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개통했다. 재임당시 여론의 반대가 있었고 심지어 각료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심했던 새만금 방조제 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시행하였다. 친환경 간척사업이 되도록 농림부를 독려하고 환경부와 전라북도에는 수질보존대책을 수립토록 지시를 하는 등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이 사업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공로로 강현욱 전북도지사로부터 전라북도 명예도민증을 받기도 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미국의 무역센타와 펜타곤에 테러사건이 발생하였고 또 탄저균에 대한 공포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 총리는 테러종합대책을 세우고 국민행동요령을 전파시켰다. 국민생활과 밀접한 5대 분야에 국제경쟁력과 경제활성화를 위해 규제개혁에 힘썼다.

DJP 연합이 깨지고 자민련소속의 장관들이 당으로 복귀할 당시에 이한동 총리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김대중 대통령의 간절한 요청과 국가가 우선이라는 신념으로 총리직을 던지지 못했다. 당시 자민련과 보수세력은 그가 배신했다고 이한동 때리기를 했지만 이 총리는 깊은 고뇌 끝에 김대중 정부와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했다. 이한동 총리가 물러난 후의 정국은 보수정당들이 국무총리 인준안을 오랫동안 통과시키지 않아서 국정의 공백을 초래했다. 장상 총리 내정자와 장대환 총리 내정자가 낙마하면서 김대중 정부의 집권후반기는 살얼음판을 밟는 듯 아슬아슬하게 지탱해 갔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이한동 전 총리의 즉각 자민련 복귀는 바로 국정의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한동 총리는 관운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한 번도 하기 힘든 집권당의 원내총무를 세 번씩이나 하고 당직으로는 사무총장, 정책위의장을 거쳤고 한나라당 대표, 자유민주연합당 대표를 했으니 주요당직은 다 섭렵했다. 국회직은 국회부의장을 했고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거쳤으니 대통령 빼고는 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법조인으로서는 판사, 검사, 변호사도 두루 경험했으니 관운이 엄청난 분이다. 단지 운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연구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남보다 뛰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좌우명인 진인사 대천명(眞人事 對天命), 덕필유린(德必有隣)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싶다

이한동은 큰 정치를 했던 사람이다. 잔 수를 쓰지 않는 우직함과 양보와 타협을 할 줄 아는 도량을 가진 분이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대통령들이 칭찬하는 최고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회고록 마지막 부분에서 보수우파에 대한 제언도 했다. 개혁을 등한시하면 보수는 망한다고 했다. 긍정적 역사관 확립과 보수의 철학을 주문하고 보수의 혁신운동을 주장했다. 젊은 보수층을 기워야 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한동 회고록은 정치인들이 한번은 읽어야 할 교과서라고 생각한다. 한국정치가 타락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정치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제시해주는 답이 들어 있는 듯하다.

이병익 기자 webmaster@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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