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를 고문했던 그곳,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 추모공간으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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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를 고문했던 그곳,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 추모공간으로 변신
  • 김용숙 기자
  • 승인 2018.12.18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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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추모공간 '근태서재 시 소리 숲' 21일 개막... 딸 김병민 큐레이터가 직접 기획해 추모공간 조성
▲ 1985년 9월 4일부터 26일까지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했던 바로 그곳,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가 김근태 추모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자료=김근태재단)
ⓒ 데일리중앙

[데일리중앙 김용숙 기자] 도심 한가운데 알 수 없는 건축물 작은방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울지하철 1호선 남영역 플랫폼에서 보이는 7층의 검은 벽돌 건물은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서있다. 건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유달리 5층 좁은 창이 눈에 와서 박힌다.

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이다. 5층 끝 방 515호는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이 1985년 9월 4일부터 26일까지 물고문과 전기고문 구타를 당했던 조사실이다.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은 그들의 폭력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김근태를 육체적·정신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고문을 저질렀다.

김근태 뿐만 아니라 많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인사들이 고문당했던 남영동 대공분실 5층엔 16개의 조사실이 있다. 현재 모습은 2000년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박종철 열사가 숨진 509호를 통해 당시 형태를 짐작할 뿐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목재 타공된 방음벽만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방음벽은 이곳에서 일어난 반인륜적 범죄를 지켜본 목격자이자 고통당한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감춘 은폐자였다.

민주주의자 김근태 7주기를 기념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생사를 넘나들며 고문당했던 바로 그곳,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에 추모공간을 꾸미고 '근태서재 시 소리 숲' 전시가 마련된다.

'근태서재 시 소리 숲'은 김근태 재단 주최로 오는 21일 오후 5시 개막해 연중(설, 한가위, 공휴일 제외)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앞으로 민주인권기념관(가칭)으로 변화하게 될 옛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청에서 시민의 손으로 돌아간 뒤 처음 일반에 선보이는 전시공간이자 추모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다.

유족(딸)이자 기획자인 김병민 큐레이터가 직접 기획해서 추모공간을 꾸몄다.

'근태 서재 시 소리 숲'은 아카이브 설치 작가 이부록이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서재를 상징적으로 복원한 작업이다. 작가는 조사실의 방음벽을 노출시켜 최대한 고통의 기억을 가리지 않고 서재를 재현했다.

방음구멍이 보이는 서재 조형은 비둘기집을 의미하는 고대의 납골묘 형식 콜룸바리움(columbarium) 양식을 모티브로 515호의 기둥이나 공조기로 굴곡진 공간에 벽감을 조성해 평평하게 만드는 의미로 차용했다.

크고 작은 벽감을 통해 새롭게 노출된 벽을 만들고 원래 있던 방음벽을 뒤로 후퇴시켰다. 다양한 크기의 벽감에는 고인의 유품 및 오브제를 배치했다.

서재는 유품과 수감 중 읽었던 시집 25권, 방음 구멍을 재구성해 인두-점으로 필사한 시의 언어와 어록, 책 자료, 추모전시를 통해 창작된 기억사물, 삶을 기록한 영상 등으로 구성됐다.

전시된 시집 25권은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이 수감됐을 당시 읽었던 책을 재현한 것이다.

그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번갈아 당한 이후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거나 먹지도 못했고 두통이 심해 읽고 쓰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오직 '시' 읽기만 가능했다. 예술의 언어로 회복을 꿈꿨던 그의 흔적을 찾아 다시 남영동 515호로 가져왔다.

이부록 작가는 5층 15호 공간에 다양한 상징과 메시지를 담았다.

서재 조형은 무덤 형식인 콜룸바리움을 상징하고 그 안에 배치된 시집 책과 인두로 필사한 텍스트는 마치 묘 비석처럼 새겨져 존재한다. 영원히 잊지 않도록 불 인두로 아로새긴 민주화의 역사와 고통의 역사를 필사적으로 필사한다.

남영동 조사실의 욕조는 물고문을 위한 시설로 설계됐다. 욕조가 갖춰진 조사실은 다른 수사기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사례라고 한다. 비록 현재 5층 15호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남영동에서 조사받은 사람 중 대다수가 물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죽음을 상징하는 '칠성판'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위한 도구로 다른 조사실보다 넓은 15호에서 사용했다. 칠성판은 본래 시신을 눕히기 위해 관 바닥에 까는 얇은 널빤지인데 북두칠성을 본떠 일곱 개의 구멍을 뚫은 모양을 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저들이 원하는 진술을 하지 않으면 515호 고문실로 끌려 와 알몸으로 칠성판 위에 묶여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부록 작가는 조사실 가운데 전시된 파놉티콘을 형상화한 테이블에 '칠성판'을 연상시키는 오래된 나무를 배치해 전시했다.

김용숙 기자 news7703@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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