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교, 5.18 편의대 피해 증언... "폐인 된 사람 많고 트라우마 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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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교, 5.18 편의대 피해 증언... "폐인 된 사람 많고 트라우마 심해"
  • 송정은 기자
  • 승인 2019.05.16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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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교, 과거 5.18 광주민주화 운동 피해 증언... 서석고등학교 학생들 61명 체험담, 책으로 엮어
▲ 5.18 증언자인 오일교 씨는 1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과거 5.18 민주화 운동 때 편의대로부터 피해를 당했던 일을 설명했다.(사진=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홈페이지 화면 캡처)
ⓒ 데일리중앙

[데일리중앙 송정은 기자] 최근 미군 정보요원 출신 김용장씨가 "전두환의 (광주) 방문 목적은 사살 명령 때문"이라 증언해 큰 파장을 낳고 있다.

또 505 보안부대 전 수사관 허장환씨도 과거 5.18 민주화운동 때 계엄군의 만행에 대해 증언을 했다.

이처럼 그동안 독재의 후예들에 의해 숨겨져 있던 수많은 증거와 증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역사의 패륜아들을 하루빨리 단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진실의 시계는 헬기까지 동원해 광주시민을 조준 살해한 5.18 참극이 벌어진 39년 전 오월의 그날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

또 다른 5.18 증언자인 오일교 씨는 1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과거 5.18 민주화 운동 때 편의대로부터 피해를 당했던 일을 설명했다.

미국 정보원 출신 김용장씨는 지난 14일 한 인터뷰에서 '편의대'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편의대란 무엇을 의미할까?

'편리한 의복을 하고 시민들 사이에 끼어서 교란, 공작 활동을 하는 군인, 편의대'라고 진행자는 설명했다.

오일교 씨는 과거 당시 서석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고.

얼마 전 그는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책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오일교 씨는 자신의 책에 대해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저희들이 한번 소소하니 엮어봤다"며 광주 서석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경험들을 썼다고 전했다.

오 씨는 "부모 형제인 저희 가족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그때 당시 있던 얘기 그대로"라며 '그 안에 당했던 이야기를 하면 그렇지 않냐? 많은 상처를 받고 계시는데 너무 험한 일을 당한 거라 얘기를 못 했었다"고 털어놨다.

그렇다면 가족 이외에 외부 사람들에게조차 전혀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오 씨는 "소준열 별 2개인가 다셨던 그 양반이 단상에서 했던 얘기들이 있다"며 "여기에 있었던 일들을 밖에 나가서 얘기를 하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바로 구속이다. 군법회의에 넘겨지니까 최하 무기징역, 사형도 가능하고. 그렇게 얘기를, 엄포를 놓은 거다"라고 설명했다.

'고3 때 끌려가서 고초를 겪은 그 일을 나가서 발설하면 그건 유언비어로 처리가 돼서 심지어는 무기징역까지 받을 수 있다 그랬냐?'는 진행자 질문에 오 씨는 "네. 그렇다. 제가 거기에 고문당하면서 탈진하고 기절한 게 한 3번 정도 될 거다"라고 밝혔다.

오일교 씨는 "어마무시하게. 그런 이야기를 쉽게 할 수가 없잖아요. 묻고 가려고 했었던 거다"라며 "제가 그날 기억하기로 5.18 그날 당시 오후에 학교 휴교령이 내렸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시내가 시끄러우니 학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자숙하세요 하더라고요. 그런데 젊은 혈기에 그게 궁금하지 않냐?"며 "자꾸 시내는 저렇게 시끄럽다고 하지 시내버스는 다니지를 않지. 그러니까 그때 당시 형님댁에서 금남로 4가까지 걸어서 갔다"고 말했다.

이어 "가니까 공수부대원들이 젊은 사람은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피가 막 터져...그러면 질질 끌어당기고 끌리고"라며 "일반 시민이고 뭐고 인정사정없이 젊은 사람들 있으면 무조건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머리 내리쳐서 끌어내리고"라고 밝혔다.

또한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구타를 하고 가격을 했죠. 진압을 했다"고 덧붙였다.

'군복을 입은 누군가한테 끌려가신 게 아니라 사복 차림의 시민으로 보이는 누군가한테 당하셨다는 사실이냐'고 묻는 진행자 질문에 오 씨는 "20일날이다. 관광버스고 시내버스고 트럭이고 전 시내 광주 시민들이 탔을 거 아니냐?"며 "내가 관광버스에 탔던 그 버스 안에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카리스마가 있더라. 그러니까 형처럼 따랐다"고 말했다.

그는 "형, 형 그러고 이렇게 따랐는데 그 양반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좌석 뒤에 시트 커버를 씌우는 돼 있는 천이 있었다"며 "그 시트를 벗겨서 그 친구가 벗겨서 두건처럼 쓰래요. 썼다. 그러니까 버스 창에 보면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커튼을 뜯어서 복면처럼 밑에를 입 주위에 뒤에를 묶으면 복면처럼 커튼을 갖고 묶으라 이거다. 눈만 나오게, 눈코만 나오게. 이렇게 묶으라고. 딱 묶으니까 눈만 나오는 거다"라고 말했다.

오 씨는 "눈만 나온다. 저희는 그거를 어떻게 알겠냐? 요령을 가르쳐주니까 그대로 따라했다"며 그 형에 대해 "아주 카리스마가 강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그다음에 뭐라고 하냐면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생들을 구출하자. 이 구호다"라며 "그때 당시 저희 고3이 전두환이가 누구고 그걸 알 수가 없잖아요. 그때 당시에 우리는 전두환이가 누군지도 모르죠"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그가 그 때 시위에 참여했던 이유가 뭘까?

'무고한 시민들을 막 때리고 휘두르고 잡아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함께하신 거냐?'라는 진행자 질문에 오 씨는 "그렇다. 너무 분개하고 분하고 이게 너무 억울하니까. 학생들이 다 잡혀 있다 그러니까 학생들 구출하자 이 말이다"라고 답했다.

오 씨는 "너무 구타가 심하고 피가 막 터져서 질질 끌려다는 걸 보니까 다 흥분한 거다, 시민들이 전체가 너 나 할 것 없이 남녀노소"라며 "이 양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남대에 학생들이 많이 잡혀 있으니까 구출하러 전남대로 가야 된다 그러니까 기사가 전남대로 차를 몰아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전남대 정문을 딱 들어가니까 그 입구에 공수부대원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며 "그 우리 차에 있던 그 젊은 친구가 유별나게 리더십이 강했어요, 카리스마가"고 떠올렸다.

그는 "우리 차 안의 리더는 그 양반이다. 저 바리케이드를 밀어야 된다 그거다"라며 "딱 밀고 들어갔는데 그 공수들이 바닥에다가 총을 그냥 쏘는 거다. 덜덜덜덜 갈기니까 우리 같은 소시민은 아무 무기도 없다"라고 말했다.

오 씨는 "상대가 되겠냐? 그 많은 사람들 밀집해서 와 하고 들어갔다가 다시 와 하고 뒤로 밀려 나오는데. 그와중에 저는 하천에 빠졌다"며 "그 하천에 빠져서 철망을 타고 넘으니 거기가 광주역이다. 그날이 20일날 오후 5시, 6시경이 됐다, 집에 오니까"라고 회상했다.

그는 "와서 옷을 갈아입고, 냄새가 심하니까. 다시 나가려고 하는데 큰형님한테 잡힌 거다"라며 "큰형님이 집에서 너는 앉아서 집에서 공부를 해라, 방에 들어가라 하는데 그 젊은 혈기에 잠이 오겠냐? 유리창문을 열고 모르게 담을 넘어서 도망갔다"고 전했다.

이어 "형님 모르게 다시 시위대에 합류를 한 거다. 그런데 어떻게 가서 우연히 그 양반을 다시 만난 거다"라며 "서로 이야기하다 보니까 거기 검문소 입구 있는 데 거의 다 다다랐다"고 설명했다.

오 씨는 "검문소 근처에 한 30m 전방에서 느닷없이 뒤에 옆구리에다가 총을 딱 들이대더라"며 "그 양반이 나한테 손들어 그러더라. 내 뒤에 옆구리에 총을 대는 거다. 손들어 그러고.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겠냐? 왜 이러세요 그러니까 인마, 손들어 그러더라"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 가 그래서 그렇게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뒤에서 그 신분증이 뭔지도 모르겠다"라며 "손을 내미는데 딱 그 사람들이 딱 보더니만 공수부대원 2명이 손들어 그러더라. 높이 손들어 그러더라"라고 말했다.

또한 "그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내 목하고 등을 내리찍더라. 옆에 경찰관이 수갑을 채우더라"고 떠올렸다.

그는 "이상한 건 뭐냐 하면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나를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한테 넘기고 뭐라고 하냐면 이 새끼도 주동자야. 그 말 한마디 딱 하고 반대편으로 넘어가더라. 초소 쪽으로"라며 "그 군인들 말이 정말 살벌했다.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 하면 금땅콩 맛을 볼래"라고 전했다.

이어 " 금땅콩, 총알. 총알 표현을 금땅콩으로 이야기한 거다. 그러면서 이 새끼들 다리 밑에 데리고 가서 죽여버릴 거야 그러더라"라며 "그사이에 상무대에서 지프차가 온 거다"라고 밝혔다.

'검문소에 오일교 고등학생을 넘겼더 넘겼던 그 형, 진짜 그 시위대의 주동자였던 그 사람이 정확히 맞냐'는 진행자 질문에 오 씨는 "하루 종일 같이 다니고 그 양반이 복면, 두건 어떻게 쓰는 방법, 커튼 뜯어서 머리 묶으라고 했고 전남대로 도청으로 그렇게 하루 종일 다녔는데 그 모르겠냐?"고 말했다.

이어 "6월 초경에 아마 석방됐을 거다. 석방돼 나왔으니까 한 20일 정도 있었다. 정확한 날짜는"이라며 "공포 분위기가 됐는데 느닷없이 헌병대 취조를 당하는데 날마다 불려나가는 거다, 몇 명씩"이라 말했다.

그는 "적극적인 가담자. 총격하다가 걸린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등에다 빨간 매직으로 표시를 해놔... 한번 불려갔다가 나오면 그 사람은 반 초주검이 돼서 온다"라며 "아침 6시 기상, 저녁 밤 10시에 취침이다. 그렇게 생활하고 있는 와중에 27일날 밤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취침해서 잠이 들었는데 느닷없이 기상 그러더라"라며 "1차 석방자 명단을 호명한다 그래서 일어났더니 내가 포함돼 있어서 석방이 된 거다"라고 떠올렸다.

최근 '미국 정보원의 증언도 나오고 여러 고백들이 나오면서 하나둘 진실들이 드러나는 걸 보면서는 어떤 생각 드냐'는 진행자 질문에 오 씨는 "기가 막힌다. 허탈하다, 너무 어이없고. 내가 저희들의 인생의 진로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고 말했다.

또한 "폐인이 된 사람도 많고 제 주변에 친구 같은 경우 결국 죽었는데, 그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라고 덧붙였다.

송정은 기자 beatriceeuni@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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