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마니산과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를 둘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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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마니산과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를 둘러보고
  • 석희열 기자
  • 승인 2019.07.07 2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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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사발에 간장 한종지... 연산의 흉리가 황혼에 서럽다
인천시 강화군 마니산 꼭대기에 올라 서니 강화군 화도면 일대가 한눈에 굽어 보였다. 마니산 참성단 가는 길에 누군가 쌓아 놓은 돌탑이 인상적이었다.copyright 데일리중앙
인천시 강화군 마니산 꼭대기에 올라 서니 강화군 화도면 일대가 한눈에 굽어 보였다. 마니산 참성단 가는 길에 누군가 쌓아 놓은 돌탑이 인상적이었다.
ⓒ 데일리중앙

[데일리중앙 석희열 기자]  오늘 다시 강화도 마니산에 올랐다. 산꼭대기에 단군이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다기에...

"만길 현모한 제단은 푸른 하늘에 닿았고/ 소슬바람 은근한 기운이 내 마음을 밝게 해주네//..."

조선 후기 문인 서영보는 마니산 참성단을 이렇게 노래했다.

내 훗날 그를 만나거든 이리 구불 저리 구불 기암괴목으로 울퉁불퉁한 바위산을 '어떻게 올랐을꼬'라고 물어보고 싶다.

참성단 가는 길에 누군가 돌탑을 세워 공덕을 쌓아 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불가에선 흘러가는 물도 떠주면 공덕이라 하는데...  

땀을 비오듯 흘리며 한사코 마니산 꼭대기에 우뚝 서니 때마침 불어오는 산바람이 갓 길어 올린 샘물처럼 맑고 상쾌하다.

강화군 화도면 일대가 한눈에 굽어보였다. 시야가 일망무제로 확 트였다. 

여기가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이다. 그 옛날 신선들이 마니산 절경에 취해 놀았음직하다.

7일 해질녘 안천시 강화군 교동면 연산군 유배지를 둘러보자니 한 평 남짓 유배지에 갇힌 연산의 흉리가 황혼에 서러웠다.copyright 데일리중앙
7일 해질녘 안천시 강화군 교동면 연산군 유배지를 둘러보자니 한 평 남짓 유배지에 갇힌 연산의 흉리가 황혼에 서러웠다.
ⓒ 데일리중앙

오후에는 교동도로 향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본 뒤 해질녘 화개산 절벽 연산군 유배지에 들렀다.

1506년 9월 2일 중종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이 경복궁을 나와 평교자를 타고 연희궁을 거쳐 함거에 실려 김포~통진~강화에서 묵은 뒤 교동도에 위리안치되는 장면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보면 1506년 9월 2일 중종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그날 바로 폐위돼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됐다.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내전문을 나와 땅에 엎드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 특별히 왕의 은혜를 입어 죽지않게 됐습니다"라고 고한 뒤 4명이 메는 평교자에 올라탔다. 당시 평교자는 종1품 이상이 타는 가마다.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 1명이 따라갔고 정3품 당상관이 군사들과 함께 호위했다.  

9월 2일 창덕궁을 빠져나와 서대문으로 한양도성을 벗어나 연희궁 근처에서 첫날 유숙했다.

둘째날 김포, 셋째날 통진에서 유숙한 뒤 넷째날 강화로 들어와 유숙하고 다섯째날인 9월 6일에 유배지인 교동에 도착했다.

연산군이 안치된 곳의 울타리는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 없었으며 작은 문 하나가 있어 음식을 간신히 넣을 수 있었다.

연산군이 안으로 들어가자 시녀들이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교동도 화개산 중턱 절벽 한 평 남짓한 곳에 안치될 때 그의 흉리가 어떠했을까.

연산군이 안치된 곳에는 군졸이 창을 들고 지키고 있었고 문 밖에서는 나인 한 명이 임금을 부르며 엉엉 울고 있었다.

방 안에는 밥 한 사발에 간장 한 종지, 그리고 연산군. 들릴 듯 말 듯 폐위된 연산군의 흐느낌이 황혼에 서러웠다.

연산군은 교동에 유배된 뒤 역질에 걸려 물도 마시지 못하고 눈도 뜨지 못하다 그해 11월 8일 죽었다. 폐위된 지 두 달 만이다.

석희열 기자 shyeol@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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