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선생 타계... 향년 88세
상태바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선생 타계... 향년 88세
  • 김영민 기자
  • 승인 2021.02.15 10: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큰 별 지다
노나메기 세상 위한 큰 뜻 품고 먼 길 떠나다

 

한국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큰 별 백기완 선생이 15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copyright 데일리중앙
한국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큰 별 백기완 선생이 15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 데일리중앙

[데일리중앙 김영민 기자] 한국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큰 별이자 '민중의 영원한 벗' 백기완 선생이 15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통일문제연구소는 노나메기 세상을 위한 큰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셨다고 선생의 부고를 전했다.

백기완 선생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오다 이날 새벽 눈을 감았다.

선생은 70~80년 학창 시절을 보낸 이 땅 청년들에게 큰 울림을 줬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의 작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랫말의 모태가 된 '묏비나리'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백미담·백현담씨, 아들 백일씨가 있다.

통일문제연구소는 이날 오후 1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앞에서 선생의 발인 및 장례일정을 발표한다.

선생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9일 오전 8시,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백기완 선생은
1950년 18살이던 백기완 선생. (사진=민족문제연구소) copyright 데일리중앙
1950년 18살이던 백기완 선생. (사진=민족문제연구소)
ⓒ 데일리중앙

1933년 1월 24일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에서 태어난 선생은 초등학교만 다니고 혼자서 공부(독학)했다.

1945년 8.15해방 뒤 열세 살에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왔다.

한반도 분단이 한 가족의 분단으로 이어져 여덟 식구가 남북으로 나뉘어 살게 되자 갈라진 집안을 하나로 잇고자 통일운동을 하게 됐다.

독학으로 시, 소설 등 문학작품을 읽고 영어사전을 모두 외워 영어 천재로 신문에 알려지기도 했다.

1948년 서울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뵙고 고결한 뜻에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선생은 살아생전 회고했다.

1964~65년에는 6.3세대와 연대해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펼쳤고 함석헌, 장준하, 계훈제, 변영태 선생 등과 반일 투쟁에 나서 연행 구속되기도 했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부통치에 저항해온 선생은 1987년 대선에 30년 가까이 이어진 군사독재 청산을 위한 학생, 노동자, 민중들의 요구로 민중대통령 후보로 추대 출마하기도 했다.

이후 이라크 파병 반대 투쟁, 기륭전자 투쟁, 용산참사, 세월호 참사,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에서 민중의 맨 앞자리를 지켰다.

2000년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운동을 제창했다. 이때부터 계절마다 내는 책 '노나메기'가 창간됐다. 

2017년 세월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우며 추모 연작시 '쪽빛의 노래'를 발표했다.

2019년에는 민중의 전형을 빼어나게 빚어내고 노나메기 사상을 담은 서사 <버선발 이야기>를 펴냈다.

2020년 병상에서 심산 김창숙연구회가 주최한 '제22회 심산상'을 받았다.

2021년 2월 15일 새벽 노나메기 세상을 위한 큰 뜻을 품고 먼 길 떠났다. 

김영민 기자 kymin@dailiang.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