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역사에서 지워졌던 페이지를 복원하다
상태바
[서평] 역사에서 지워졌던 페이지를 복원하다
  • 그날지기 기자
  • 승인 2008.08.25 09:4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토니 클리프 <여성해방과 혁명>... 민중 관점에서 본 노동 여성들의 역사

나를 바꾸는 한 권의 책- 토니 클리프, <여성해방과 혁명>. 인문사회과학서점 '그날이오면'에서 2008년 1월부터 7월까지 판매된 도서 순위 42번째 책이다. 여성해방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지, 그 힘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최근 한국 시민사회의 힘이 위력적으로 발산되고 있는 촛불혁명과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 읽어보기를 권한다. 독자들의 도움을 주기 위해 '그날이오면' 서평을 싣는다. <데일리중앙> 편집자 주.

▲ <여성해방과 혁명> 표지.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History'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Herstory'를 쓴다. 여성이 역사에서 은폐되고 역사가 남성 중심으로 서술된 사실을 봤을 때, 그런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History'의 어원인 그리스어 'Historia'가 '발견(finding out)'이나 '앎(knowing)'을 의미하고 실제로는 여성 명사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남성들 중에서도 오직 소수 만이 역사에 등장하는 특권을 얻었음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역사는 언제나 통치자들 중심이었고, 이것은 여성들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잔 다르크나 엘리자베스 여왕과 같은 인물 중심이 아니라, 착취받고 좌절하면서도 언제나 새롭게 일어서는 여성 민중의 관점에서 은폐되고 알려지지 않은 노동 여성들의 역사를 복원한다.

저자는 역사에서 여성의 지위를 '피해자'로 규정한 시몬 드 보부아르와 같은 생각이 오히려 여성을 역사의 객체로 만든다고 비판한다. 역사에서 제외된 여성들의 역사 속에는 빵과 일자리를 요구하며 싸운 노동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 평범한 우리 어머니, 언니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여성들을 역사의 주체로 일으켜 세운다.

여성해방의 가능성이 싹텄던 혁명의 파노라마
 
대부분의 책들이 혁명의 역사를 다룰 때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이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나아졌는지 궁금해진다. 이 책은 그런 갈증을 해소해 준다. 그리고 인간 역사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혁명 속에서 여성해방의 가능성이 자라나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7세기 영국 혁명은 최초로 새로운 성 도덕이 얘기된 여성해방의 출발지였다. 오늘날 사람이 보더라도 매우 급진적인 주장들이 펼쳐진다. 도시 빈민들에게 지지를 많이 받은 랜터파(Ranters)는 일부일처제를 반대했다. 또한 디거파(Diggers)는 일부일처제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배우자의 자유, 경제적·법적 구속을 받지 않을 자유, 그리고 선택의 자유에 기초를 둔 일부일처제를 주장했다.
 
프랑스 혁명에서는 어땠을까?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이 여성의 운명을 바꿨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결코 없었다... 그 혁명은 거의 전적으로 남성에 의해 이룩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여성들은 프랑스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여성이 빠진 식량 폭동은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할 정도로 식량 폭동에서 주도적 구실을 한 여성들은 이후에 벌어진 정치적 봉기에서도 적극적이었다. 게다가 실질적 성과도 있었는데, 혁명으로 상속법이 바뀌어 딸과 아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됐고 혁명적 이혼 법은 남녀를 평등하게 다뤘다.

민중의 해방구였던 파리코뮌에서는 여자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최초로 설립되고 노동 여성을 위한 보육시설이 공장 근처에 세워졌다. 그리고 여성들은 코뮌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최후까지 바리케이드 뒤에서 남성들보다 더 오래 버텼다.

러시아 혁명은 그야말로 여성해방의 이정표였다. 여성은 완전한 선거권을 갖게 됐고,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사라졌으며, 여성에게 동일임금을 지급했고, 전면적인 유급 출산휴가가 도입됐다. 간통, 근친상간, 동성애 처벌이 형법에서 삭제됐다.

2년 동안 소비에트가 이룬 성과는 다른 선진국들이 지난 130년 동안 한 일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컸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못지않게 중요한 '부엌과 결혼의 분리'를 위해 공동 급식이 이뤄졌다. 1919~1920년에는 전체 인구의 거의 90%가 공동 급식을 이용했다.

위대한 성취와 비통한 실패를 반복한 오랜 성쇠의 이야기

혁명 속에서 여성들이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지만, 여성해방은 미완으로 끝났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성들은 차별받고 억압받고 있다.

왜 그럴까? 이 책은 여성들의 반복된 승리와 실패의 이야기들 속에서 그 원인과 한계를 친절히 설명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엄청난 구실을 한 파리코뮌 당시 코뮌은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공화주의 전통과 코뮌의 전반적인 정치적 미성숙 때문이었다.

또,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가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제도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의 근본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이 독일로 확산되는 데 실패하면서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고 스탈린의 반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와 한계는 남성들의 탓일까? 이 책의 뒷부분에서 여성운동의 계급적 뿌리와 여성 억압의 기원 등을 다루면서,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여성 문제를 여성 대 남성의 문제로 바라보는 페미니즘과 달리, 이 책은 '여성'이라는 결속된 독자적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취한다.

저자는 남성 지배는 계급사회나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초역사적 요소가 아니며,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과 국가의 기원>에서 밝히듯이 사유재산과 계급사회의 등장이 여성의 종속을 낳았다는 주장에 지지를 보낸다.

또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여성해방운동의 구호는 정치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정치적 변화를 목적으로 한 집단행동을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저자는 반복되는 승리와 실패의 역사가 완전한 승리로 끝나기 위해서는, 그리고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개인적 해결책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날지기 기자 gnalzigi@gmail.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성해방 2008-08-25 21:14:34
올만에 좋은 서평이군.
그날이오면이 계속 인문사회과학 서점으로 명맥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어려움에 봉착해 서울대생들과 독자들의 도움으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잇다는데
참 잘된일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 서점이 장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