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4.19... "자유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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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4.19... "자유여 만세!"
  • 석희열 기자
  • 승인 2014.04.1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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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 1960년 4.19혁명 당시 경무대 앞 시위 중 경찰이 쏜 총탄을 맞고 스러져간 당시 서울대 문리대 3학년 김치호씨 묘역 앞에 누군가 꽃을 바쳤다.
ⓒ 데일리중앙
"이젠 우리 폭정에 견딜 수 없어/ 자유의 그리움으로 분노를 뱉는다/ 아, 총탄에 뚫린 4월 그 가슴 위로/ 넋이 되어 허공에 출렁이는 아 자유여 만세"
(서울대 메아리, '4월 그 가슴 위로' 중에서)

54년 전 4월의 그날- 한여름처럼 양광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광화문 세종로 종로 일대를 노도와 같이 휩쓸던 젊은 함성들.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민족사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주의 횃불 4월혁명.

무심한 세월은 흘러 그날로부터 반세기가 지났건만 혁명의 상흔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때 치우지 못한 혁명의 찌꺼기들은 수십년 동안 그대로 쌓이고 쌓여 더욱 기승을 부리며 온갖 질병과 해악을 이 땅에 뿌리고 있다.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무능한 정치 권력은 여전히 이 사회 깊숙히 똬리를 틀고 앉아 우리 사회를 옥죄는 굴레로 작동하고 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던 그날의 함성으로 우리는 단번에 절망의 질곡에서 희망의 기슭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새벽을 틈타 한강을 건넌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무장해제당해야 했다.

실패한 혁명이 다음에 결과할 반동의 역사를 한 치만 내다보았던들 4월혁명은 그때 그처럼 그렇게 속절없이 좌절하지는 않았을 것을-.

▲ 54년 전 오늘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자유를 부르짖으며 떨쳐일어났던 젊은 영혼들이 독재의 총탄에 스러져 갔다.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서울 수유리 4.19 민주묘역에는 아침부터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 데일리중앙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영도의 '진달래')

정치권은 19일 서울 성북구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역에서 열린 54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4월 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을 오늘에 되새겨 참 민주주의와 국민화합을 이뤄내자"고 강조했다.

민현주 새누리당 대변인은 "선열들이 피땀으로 성취한 자유민주주의 수호는 대한민국 국민의 중요한 권리이자 책무이다. 이 소중한 가치를 훼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된다"며 "1960년 4월 19일 그날의 열망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근 새정치연합 부대변인은 "1960년 4월 19일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온 국민이 분연히 일어난 날이었다"며 "민주영령들이 그리던 민주주의가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옷깃을 여미게 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날"이라고 민주 영령들의 넋을 기렸다.

이날 4.19 민주묘역에는 청소년들의 발길도 잇따랐다.

친구들과 함께 이날 4.19 묘역을 찾은 경희여중 김선화양은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4.19혁명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 묘역을 찾았다"고 말했다.

▲ 4.19 혁명 54돌인 19일 서울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역에서 국가보훈처 주최로 4.19혁명 기념식이 열렸다.
ⓒ 데일리중앙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고 진달래 피는 4.19 민주묘역. 산허리를 감싸고 도는 안개비에 자욱이 젖은 4.19 묘역에는 전날부터 참배객들의 발길이 하루종일 이어지고 있다.

1960년 4월 19일 신설동 네거리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이 쏜 총탄에 쓰러진 곽종한(당시 19세)씨의 친형 곽종식(79)씨는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젊은 주검들이 아스팔트 위에 꽃잎처럼 나뒹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서울대 문리대 김치호. 그의 비석에는 '평북 신의주 출생. 서울대 문리대 3년 재학. 1960년 4월 19일 경무대 앞 시위 중 총상. 같은 날 수도육군병원에서 사망.' 이라고 적혀 있다. 묘역에는 작은 무덤과 함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안병채(安炳彩). 경북 영풍 출생. 당시 동신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던 그는 1960년 4월 19일 신설동 네거리 시위대령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역에는 비석만 세워져 54년 전의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무덤이 있는 묘역은 유족의 뜻에 따라 시신 안장을 한 경우이고, 비석만 세워져 있는 묘역은 마찬가지로 유족의 뜻에 따라 유골 안장이라고 한다.

265명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4·19 민주묘역에는 먼저 가신 임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듯 산 허리의 높은 잎들이 햇볕을 받아 소리없이 반짝였다.

▲ 시인 박목월은 4월 혁명 영령들을 '죽어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라고 추모했다.
ⓒ 데일리중앙
시인 박목월은 언젠가 4월 영령들을 "죽어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라고 추도했다.

또 유안진 시인은 "지금쯤 장년고개 올라섰을 우리 오빠는 꽃잎처럼 깃발처럼 나부끼다 졌다"면서 "해마다 4월이 오면 새잎으로 꽃으로 다시 살아오신다"고 했다.

석희열 기자 shyeol@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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