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프랑스에 살아있는 '졸라정신'과 한국의 '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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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프랑스에 살아있는 '졸라정신'과 한국의 '기레기'
  • 최인숙 기자
  • 승인 2014.12.24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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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 박사 "'시앵 드 갸르드' 포기하고 정치혐오만 부추기는 한국 언론"

프랑스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 정치학 박사이자 미래연 회원인 최인숙 박사가 프랑스의 대통령·정치인과 정치 그리고 미디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교·분석하는 칼럼을 미래연 홈페이지에 기고하고 있다. 미래연의 동의를 얻어 최인숙 박사의 칼럼 전문을 여기에 싣는다. - 편집자 주

▲ 프랑스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 정치학 박사이자 미래연 회원인 최인숙 칼럼리스트.
ⓒ 데일리중앙
권력과 결탁해서 진실을 왜곡하는 미국의 기자군단을 '화성에서 온 언론인'이라 촘스키는 지칭했다.

한국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후의 우리 기자들을 '기레기'(기자쓰레기)라고 불렀다.

진실이 아닌 날조된 얘기, 확인도 안 된 사실, 권력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쓴 기사를 남발해 여론조작을 일삼는 기자들을 경멸하는, 코믹하기보다는 절망적인 풍자이다.

한국 언론의 이러한 보도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대 발행부수를 뽐내는 <조선일보>와 국민의 시청료로 운영되는 <KBS>가 과거 12.12군사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의 진실은 감춘 채 이 슬픈 역사의 주범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찬양한 기사를 보도한 사실은 역사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굳이 과거를 들출 필요도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절대권력을 언론이 비판하기는커녕 되레 비판자의 입을 비판하는 권력의 나팔수를 자처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4대강사업·2012년 대선 부정선거·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책임론·심지어 '십상시' 파문까지... 언론은 이명박·박근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감시견(chiens de garde; 시엥 드 갸르드)'을 포기하고 해바라기성 보도에 급급했다.

최근 들어서는 '계파싸움', '소모적인 말싸움', '국정뒷전' 등 부정적인 용어로 국민들의 정치 불신, 정치 혐오를 조장해 국민과 정치를 이간질시키고 있다. 이런 보도는 대통령과 정부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덮어버리기 위한 물타기 효과도 유발한다. 전력을 다해 권력 감싸기에 전전긍긍하는 꼴이다.

자본권력 종속되어도 여전히 '감시견' 역할 하는 프랑스 언론

프랑스 언론도 권력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알리미(Serge Halimi)는 그의 저서 <새로운 충견들>에서 프랑스 기자의 독립성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됐다고 개탄한다. 기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면 프랑스 언론은 여전히 감시견으로서 '제4의 권력'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 권위지인 <르 몽드>가 경영의 독립성을 상실해가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나온 쁠레넬(Hervé Edwy Plenel)과 보네(François Bonnet)는 저널리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2008년 인터넷 신문 <메디아빠르트(Mediapart)>를 창간했다. 편집의 민주성, 그리고 경제적 독립성을 확보하여 패권에 저항하고 기자정신이 상업적이 아닌 '장인적' 가치임을 상기시키고자 파이오니어가 됐다.

사르코지 정부가 프랑스공화국의 모토인 '자유(liberté)'와 '평등(égalité)', 그리고 '동포애(fratérnité)'를 거스르는 '국민정체성(Identité nationale)' 부처를 발족하고 배쏭(Eric Besson)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기존언론을 통해 대토론(grand débat)을 조직화하자, <메디아빠르트>는 이를 거부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고 "우리는 (국민정체성에 대해) 토론하지 않는다"라는 고발성 기사로 권력에 대항하면서 여론의 환기를 주도했다.

또한 <메디아빠르트>는 2010년 우파인 사르코지 정부의 재정부장관 웰스(Eric Woerth)가 프랑스 제1의 부호, 로레알(L'Oréal)의 배땅꾸르(Liliane Bettencourt) 회장한테 받은 뇌물 사건을 폭로해 결국 웰스를 장관직에서 물러나도록 선두 지휘했다.

사르코지가 리비아 대통령 카다피(Mouammar Kadhafi)로부터 5천만 유로의 선거자금을 받은 사실을 4년 간의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2014년 4월에는 좌파정부인 올랑드 대통령의 보좌관인 모렐(Aquilino Morelle)의 권력남용을 파헤쳤다.

<메디아빠르트>는 무너져가는 저널리즘을 바로 세워 프랑스 언론의 자존심과 위상을 정립하는데 기수로서 활약하고 있고, 현재 독자 수 10만을 확보하여 세계 제일의 성공한 대안언론으로 평가받는다.

에밀 졸라의 고발정신과 '변절' '시류영합' 거부하는 프랑스 언론문화

프랑스의 이런 언론문화는 역사적 전통에서 기인한다. 먼저 자뀌즈(J'accuse, 나는 고발한다)의 '졸라정신'(Esprit d'Emile Zola)이다. 지금부터 한 세기 전(1898) 신문기자인 졸라가 드레퓌스사건(affaire Dreyfus)의 진실을 <로로르>(L'Aurore) 신문에 고발하였다. 이러한 졸라의 고발정신, 이른바 '졸라정신'은 전통으로 자리 잡아 프랑스 언론에 지금껏 살아 숨 쉰다.

프랑스 언론은 나찌 정부 당시의 쓰라린 아픔도 기억하고 있다. 나찌로부터 해방된 뒤 프랑스 언론은 변절의 역사를 되풀이 할 수 없다는 신념과 정치적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정론의 길을 걷겠다는 자세를 확립시켰다. 드골 대통령은‘언론이 도덕적 윤리의 상징적 존재’임을 무척 강조하였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오래된 언론은 일제시대에 '일본 천황폐하의 탄생일을 축하'하거나 조선인에게 '일제 대동아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가기'를 권하는 기사를 버젓이 올린, 말하자면 명백히 '친일행위'를 했던 신문들이다. 또한 이들 언론의 오너들도 대부분 친일파였거나 그의 후손들이다.

한국 언론, '썩은 상자' 바꾸고... 기자들, '애완견' 노릇 그만둬야

우리 언론의 뿌리가 이렇다 보니 권력과 언론 사이의 탯줄이 질기기만 하다. 특히 보수언론은 정치·경제권력과 유착하면서 권력의 획득과 유지를 지속해 왔다.

여기에는 기자 개인의 문제도 있지만 시스템의 문제도 크다. 짐바르도의 '썩은 사과상자'가 연상된다. 썩은 상자 안에 멀쩡한 사과를 들여 일정 기간 놓아둔 뒤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사과가 모두 썩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쁜 환경이 그 안에 놓여있는 내용물을 썩게 만든다는 '상황지배론'이다.

이 썩은 상자를 버리고 새 상자로 바꿔야 한다. 권력에 줄서기 바쁘고 권력의 애완견 노릇에 만족해하는 기자들 또한 '졸라정신'을 배워야 한다. '상업적' 가치가 아닌 '장인적' 가치가 기자정신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좋은 환경 속에서 좋은 언론 문화와 전통을 세울 때 한국 기자들은 '기레기'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고, '감시견'으로서 명예회복이 이뤄질 수 있다.

최인숙 기자 shyeol@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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