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자야와 사랑에 빠진 백석... 성북동 길상사는?

해방과 전쟁, 분단의 얄궂은 운명이 둘을 갈라놓고... 평생 그리다 90년대 나란히 세상 떠나

2018-12-10     석희열 기자

[데일리중앙 석희열 기자] 1930년대 '문단의 꽃미남'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본명: 김영한, 법명: 길상화)의 운명적인 사랑이 새삼 화제다.

당시 백석은 시를 쏟아내면 어떤 여자도 감당을 못할 만큼 여성의 섬세한 감수성을 자극했던 걸로 보인다.

백석은 특히 이국적인 생김새로 여자들에게 인기가 드높았다고 한다.

함흥권번의 기생 자야와 사랑에 빠진 백석.

서울 종로3가 단성사 극장에서 둘이서 본 영화 <전쟁과 평화> 속 여주인공 나타샤를 자야에 빗대 쓴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남기고 1939년 홀로 만주로 훌쩍 떠났다. 자야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지 딱 3년 만이다.

그리고 해방과 전쟁, 분단. 얄궂은 운명은 이 둘을 영영 갈라 놓았다.

백석은 북에서, 길상화(자야)는 남에서 죽을 때까지 서로를 그리워하다 90년대 4년 터울로 나란히 세상을 떴다.

스물 넷에 떠나 보낸 임을 평생 그리며 기다린 길상화.

그는 평생 모은 1000억원 상당의 요정 대원각 터를 무소유의 법정스님에게 시주하고 영면했다. 그의 유해는 흰눈이 펄펄 내린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삼청각과 함께 1960~80년대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가 바로 그 대원각이다.

길상화는 살아생전 "사랑했던 백석 시인의 시 한 줄이 시주한 1000억원 재산보다 값지다"는 말을 남겼다.

이 대목에서 드라마 '무풍지대'가 문득 생각난다.

김두한 이정재 유지광 등 야인시대 이 나라 주먹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1950~60년대 뒷골목 정치의 주무대가 되기도 했던 요정이 떠오르기도 하고...

야인시대 주먹들이 출입하던 그 요정이 지금은 찾는 사람도 분위기도 서비스도 많이 달라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