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선배 타계... 민주화운동 큰별 지다

민주화운동 선후배 동지들, 줄지어 조문... 고문 후유증 폐혈증으로 영면

2011-12-30     석희열 기자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졌다.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를 일기로 30일 새벽 5시31분 뇌정맥 혈전증과 2차 합병증으로 타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인재근 여사와 아들 병준, 딸 병민씨가 있다.

지병인 파킨슨병으로 지난달 29일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 서울대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오며 한때 기력이 회복돼 쾌차하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 29일 병세가 다시 악화돼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응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김 고문의 임종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가족들과 이인영 민주통합당 대표 후보가 지켜봤다.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그는 이후 승승장구하며 1965년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0.1%만 간다는 이른바 'KS(경기고-서울대)' 코스를 밟은 것이다.

서울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며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70, 80년대 엄혹한 시기,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며 민주화운동의 '대부'로 불렸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중요한 시국 사건에는 늘 그가 중심에 서 있었다.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수배와 투옥이 되풀이됐다.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에 취임하면서 당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주도했다. 그런 그에게 1985년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그해 9월에 민청련이 이적 단체로 규정되면서 남영동 대공분실(5층 15호실)로 끌여가 17일 간(9.4~20) 거의 매일 5시간씩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경찰(당시 치안본부)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 경감'을 투입했다. 이근안은 김근태 의장에게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해 말을 하게 하는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김 의장이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면 고문 기술자들은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등으로 협박하며 전기고문을 더했다. 또 집단으로 폭행을 가한 뒤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도 했다.

이후 김근태 상임고문은 고문 후유증으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지병인 파킨슨병을 얻었다.

1996년부터 서울 도봉갑에서 제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 2006년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제18대 선거에서는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과 겨뤘으나 당시 불어닥친 한나라당 열풍으로 낙선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승리하려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등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반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꿈을 위해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했으나 고문 후유증에 따른 체력 저하로 끝내 이루지 못하고 후배들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민주통합당과 진보통합당, 진보신당, 평화민주당 등은 일제히 애도 성명을 내어 고인의 생을 추억하며 영면을 빌었다. 민주통합당은 이날 오전 11시 80여 명 의원이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서 집단 조문할 예정이다.

온라인상에서도 누리꾼들의 애도 물결이 잇따르고 있다.

고인이 생전에 친구들과 소통하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이날 하루 수천명의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미니홈피를 찾은 그의 친구들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너무 애달프다"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말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못다한 꿈 이루시길" "미안하고 너무 슬프다" 등의 글을 남기며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