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름다운 것들은 늘 색깔로 먼저 다가온다.
빛바랜 기억의 사진첩 속에서도 그리운 풍경은 언제나 풀과 나무와 꽃들의 선연한 빛깔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속에 봉숭아가 있다.
어린 날의 여름해는 길고도 길었다. 그런 한낮- 아이들은 봉숭아를 찧어 손톱 위에 고운 꽃물을 들이곤 했다. 할머니가 그랬고 어머니 또한 그랬듯이 아이들의 생애에서는 그것이 늘 신비한 체험이었다.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자란 것을 난 늘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푸르른 하늘 아래 늘 푸른 산과 신록. 드넓은 들판과 푸른 계곡은 내게 무한한 꿈과 희망을 주었으며, 눈을 들어 드높은 하늘엔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니고 저녁 연기에 멀리 교회종소리가 더없이 평화로웠다.
더하여 논둑길을 따라 향긋한 풀냄새에 개구리소리가 또 얼마나 정다웠는지 모른다. 멀리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 언덕엔 저희들끼리 무리지어 피었다 지는 들풀들 그리고 꽃들….
고추잠자리를 잡으러 아이들이 뛰어가고 개울 옆 풀밭에는 흰 염소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문득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울고 있고-.
혀 끝에서 느끼는 새봄의 향기가 이렇듯 감미롭다.
각설하고...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글쓰기의 진수를 보여준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내가 갓 걸음마를 배웠음직한 1960년대 당시 문학청
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며 한국문단에 감수성의 혁명을 몰고왔다.
열에 일곱이 그의 감수성과 유려한 글쓰기에 압도되어 문학을 포기했다는 그 <무진기행>을 난 지금도
가방 속에 넣고 다닌다.
안개 낀 무진! 그래, 올 봄에는 무진에 한 번 다녀오자.
석희열 기자 shyeol@daili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