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과 야당의 반발 속에 한나라당이 기어이 새해 예산안을 날치기했다.
정부가 제출한 309조원 규모의 새해 예산안이 8일 여야 의원들 간 집단 패싸움이 일어나는 등 우여곡절 끝에 한나라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3년 연속 예산안 날치기 '활극'이 빚어졌다.
한나라당은 또 박희태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예고한 예산부수법안과 아랍에미리트(UAE) 파병안, 수자원공사 특혜법으로 불리는 '친수구역 활용에 관한 특별법',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 등 40개 법안을 야당의 반발 속에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특히 서울대법인화법 등 쟁정법안도 반대 토론없이 이날 본회의 사회권을 쥔 한나라당 소속 정의화 국회부의장은 거침없이 방망이를 두드렸다.
이에 앞서 여야 의원 보좌진, 당직자 수백명은 전날 밤부터 국회 곳곳에서 격렬하게 대치 충돌하며 '막장국회'를 예고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한나라당의 예산안 날치기에 대비해 본회의장을 점거해 밤샘 농성을 벌이며 의장석을 지켰으나 경호권이 발동된 이날 오후 야당 저지선을 뚫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 진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오후 4시15분께,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단상 앞으로 걸어나갔다.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다 나와"라고 외치자 100여 명의 의원들이 일제히 행동을 시작했다. 야당이 점거하고 있는 의장석을 향해 돌진했다.3~4명이 한 조가 되어 야당 의원 50여 명을 하나하나 의장석 밑으로 끌어내렸다. 야당 의원들이 결사항전했지만 압도적인 물량을 앞세운 한나라당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거친 욕설과 발길질을 주고 받는 등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특히 한나라당 이은재 의원이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에게 다가가 "쇼 좀 그만해라"며 끌어내려 하자 이 대표는 "내 몸에 손대지 마"라며 격렬히 저항했다. 결국 한나라당 의원들에 질질 끌려나온 이 대표는 팔 골절상 등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의장석을 빼앗긴 야당 의원들은 한나라당 의원들을 향해 "언제부터 이명박의 개가 됐느냐" "이렇게 하는 게 니들이 말하는 공정한 사회냐" "부끄러운 줄 알라"며 거칠게 소리쳤다.
오후 4시48분, 박희태 의장으로부터 사회권을 넘겨받은 정의화 부의장은 새해 예산안 등을 차례차례 직권상정한 뒤 "제안설명은 단말기로 대체하겠다"며 전자투표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일사천리였다.
투표 결과, 재석의원 166명 가운데 찬성, 165명, 반대 1명으로 309조567억원 규모의 새해 예산안이 통과됐다. 야당 의원들은 "날치기" "내려와" "그만해" 등을 외치며 정의화 부의장에게 심한 야유를 퍼부었다.
민주당이 총력을 다해 저지하려고 했던 4대강 예산은 거의 정부 원안대로 확정됐다. 민주당은 6조7000억원의 삭감을 요구했지만 한나라당은 정부가 요청한 예산안에서 2700억원을 깎는 데 그쳤다.
날치기 직후 로텐더홀(본회의장 앞)에서 열린 야4당 규탄대회에서 사회를 본 김재윤 민주당 의원은 "오늘 한나라당 독재에 의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죽고, 국회도 죽었다"고 분개했다. 그러자 수백명의 참석자들은 일제히 '한나라당 해체' '이명박 정권 사퇴'를 외쳤다.
규탄대회에서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이명박 한나라당에 의해서 오늘 강행통과, 날치기된 법률은 모두 원천무효임을 국민 앞에서 선언한다"며 "이제 우리는 국민과 함께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러 나설 것이다. 이명박 정부 이 압정과 실정 반드시 끝내고야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손 대표는 ""국회를 이렇게 유린하고 짓밟고 이 정부가 온전하리라고 생각했다면 이명박 대통령 큰 잘못"이라며 "이명박 정부는 하늘 무서운 줄 알고, 국민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대한민국의 민의가 오늘 짓밟혔다"며 "목이 터져라 날치기 반대를 외쳤지만 힘이 모자라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참담해 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오는 9, 10일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순발길에 오르는 이명박 대통령을 겨냥해 "대한민국 날치기 수출하고 오라"고 비아냥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원내대표는 "이명박 정부 들어 세번째 통곡한다"며 "이게 무슨 국회냐"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국회의원 노릇 더해야 할 지 민주노동당은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라며 "우리는 거리로 뛰쳐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도 "이게 무슨 정부고, 국회고, 국가냐"며 "이럴거면 당장 국회를 해산해야 한다"고 울먹였다. 민주당 정범구 의원은 "한나라당을 박멸하자"고 소리쳤다.한편 전현희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예산안 날치기 관련한 국회 브리핑에서 "4대강 예산 결국 막아내지 못했다. 국민 여러분께 정말 송구하고 죄송스럽다"고 말한 뒤 끝내 울음을 터뜨려 안타까움을 샀다.
또 박희태 국회의장은 한종태 국회대변인을 통해 "연말 예산국회가 파행처리를 되풀이 하게 된 것을 국민들께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석희열 기자·주영은 기자 shyeol@daili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