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자전수필 '눈물꽃 소년' 펴내... 가슴시린 어린 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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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자전수필 '눈물꽃 소년' 펴내... 가슴시린 어린 날 이야기
  • 석희열 기자
  • 승인 2024.02.20 1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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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 국민학교 졸업까지 소년 시절의 성장기
어두웠고 가난했고 슬픔이 많았던 시절
곱고도 맛깔진 전라도 사투리가 정감어린 글맛 선사
어린 시절의 풍경들이 한편의 영화처럼 그려지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가슴시린 나의 풍경이었다"
박노해 시인이 남도의 작은 동강 마을에서 자라 국민학교 졸업하기까지 소년 시절의 가슴 시린 성장기를 담은 자전수필 '눈물꽃 소년'을 펴냈다. (표지=도서출판 느린걸음)copyright 데일리중앙
박노해 시인이 남도의 작은 동강 마을에서 자라 국민학교 졸업하기까지 소년 시절의 가슴 시린 성장기를 담은 자전수필 '눈물꽃 소년'을 펴냈다. (표지=도서출판 느린걸음)
ⓒ 데일리중앙

[데일리중앙 석희열 기자] "아부지와 나는 벌교역에서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난생처음 타 보는 기차였다. 열차가 어느 역에 정차한 저녁. 아이를 업은 초라한 행색의 아낙이 광주리에 인 배를 팔고자 차창을 두드렸다. 

다들 어려운 시절이라 누구 하나 선뜻 사 먹는 사람이 없었고 기차는 곧 출발할 듯 숨 가쁜 김을 뿜으며 기적 소리를 울렸다.

그때였다. 아부지가 차창을 들어 올리더니 열 개도 넘는 광주리의 배를 다 사는 거였다. 아부지는 거스름돈을 사양하며 기차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박노해 시인이 가슴 시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첫 자전적 수필 『눈물꽃 소년』(도서출판 느린걸음, 2월 22일 발행)을 펴냈다. 

엄혹했던 독재 시절, 이땅의 노동해방과 민주화를 꿈꾸며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어로 시대와 영혼을 뒤흔든 시인 박노해. 가난과 분쟁의 지구마을 아이들 곁에서 함께 울어주는 친구. 젊은이들에게는 길 잃은 시대에 빛을 찾아 걸어가는 어른이 되어준 그. 

독자들이 그에게 가장 많이 건넨 질문은 이것이었다. '무슨 힘으로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나요?' 시인은 답한다. "내 모든 것은 '눈물꽃 소년'에서 시작되었다"고.

박노해 시인의 첫 자전수필 『눈물꽃 소년』은 그가 처음으로 전하는 '내 어린 날의 이야기'다. 남도의 작은 마을 동강에서 자라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평이'라고 불리던 소년 시절의 성장기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내가 커 나온 시대는 어두웠고 가난했고 슬픔이 많았다"고 했다. 우리의 60~70년대는 그랬다. 그는 그러나 "그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다행히 자연과 인정과 시간은 충분했다고.

시인은 "언제부턴가 너무 빨리 잃어버린 원형의 것들이, 인간성의 순수가, 이토록 순정하고 기품 있는 흙가슴의 사람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 있었다"며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가슴 시린 나의 풍경이었다"고 그때를 그리워했다.

- 장에 다녀오신 할머니가 빨간 알사탕 한 알을 입에 넣어주셨다.
"와아 달다 할무니. 겁나게 다요. 세상에서 젤 달고 맛있다아."

- 엄니가 햇살 좋은 마당에 녹두랑 팥이랑 수수를 펼쳐놓고 내게 일감을 맡겼다.
"이 장대 들고 새들 좀 봐라이."

응축된 시어가 아닌 생생한 산문의 『눈물꽃 소년』. 곱고도 맛깔진 전라도 사투리가 정감 어린 글맛을 선사한다. 다독다독 등을 쓸어주는 엄니의 손길 같은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덧 이 작은 아이가 웃음과 눈물로 우리의 마음을 휘젓는다.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듯한 문장 사이로 그가 뛰놀던 산과 들과 바다가 펼쳐지고 계절 따라 진달래 해당화 동백꽃 향기가 스며온다. 흙마당과 마을 골목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또 학교와 장터와 작은 공소와 그를 키운 풍경들이 한편의 영화처럼 그려진다. 

33편의 글마다 수록된 삽화는 박노해 시인이 직접 그린 연필 그림이다. 글의 풍경 사이를 여행하는 듯 따스함과 아련함을 독자들에게 선물한다.

- 선생님이 숙제로 내준 발표회를 진행했다. '난 어떤 사람이 되는 게 꿈인가?'
"부자가 되는 거요."
"난 이미자요!"
"하얀 가운 입은 의사요."
"친일파 잡는 대통령이요!"
내 차례가 되자… 그냥 우물쭈물….
"시방, 난 할 게 없는디라, 동무들이 다 해묵어 부러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지만 정말이지 난 심각했다. 황톳길을 걸어 약방을 하는 고모부를 찾아갔다. 

『눈물꽃 소년』의 배경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모자란 게 많고 마음껏 읽을 책조차 없던 시절 전라도 작은 산골 마을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자연과 인정과 시간은 충분했고 '순정한 흙가슴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못 배우고 가난해도 인간의 기품이 있고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가 있고 '참말'을 할 수 있는 진실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 그 속에서 자라난 한 소년의 일화가 담백하고 풍요롭게 펼쳐지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가슴 시린 풍경이 그리움과 소망을 불러 일으킨다. 

작가는 "인간에게 있어 평생을 지속되는 '결정적 시기'가 있다"고 말한다. 그 첫 번째는 소년 소녀 시절이라고.

"인생 전체를 비추는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틀이 짜여지고... 그때 내 안에 새겨진 내면의 느낌이, 결정적 사건과 불꽃의 만남이, 일생에 걸쳐 나를 밀어간다."고 했다.

박노해 시인은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나 고흥, 벌교에서 자랐다. 16세에 서울로 올라 와 노동자로 일하며 선린상고(야간)를 다녔다. 1984년 27살에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펴냈다. 이 시집은 군사독재 정권의 금서 조치에도 100만 부가 발간되며 한국 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박노해라는 필명은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으로 이때부터 그는 '얼굴 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석희열 기자 shyeol@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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