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안티가부장제로 바라보는 건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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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안티가부장제로 바라보는 건 착각"
  • 석희열 기자
  • 승인 2016.01.25 2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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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 강사 정희진씨, 남성 중심 세계관에 근본적인 의문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존재성을 몸으로 환원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정체성(계급)은 몸의 기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반면 여성의 계급성은 소유한 재산이나 능력보다는 얼마나 예쁘고 젊으냐에 따라 좌우된다."
[데일리중앙 석희열 기자] 섹스(sex)를 왜 삽입이라고 할까. 남성의 경험과 세계관이 객관적인 언어로, 지배적인 사회질서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흡입 내지 심지어는 침입이라고 해야 하지만 여성의 경험이 지배적인 언어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의 언어를 빌려쓰는 것이다. 여성학이 필요한 이유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언젠가 한 대학 강연에서 "마르크스주의자나 파시스트나 집에서 설거지 안 하기는 마찬가지"라며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는 "페미니즘 담론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이 아직도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남성의 경험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세계관은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경험이 보편화되거나 가시화되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했다.

"페미니즘을 안티가부장제로 바라보는 것은 남성들만의 착각이다. 몇 십년도 채 안된 페미니즘이 어떻게 몇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부장제의 위력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페미니즘 담론은 가부장제의 카운터 담론(대항 담론)이 아니라 가부장제를 뛰어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저항이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여성운동은 남성 중심의 사회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위계질서가 뚜렷한 가부장제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정희진씨는 "가부장제는 성폭력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며 "경찰에 신고되는 근친강간 건수가 1년에 1만2000건인데, 신고율이 2% 미만임을 감안하면 일가붙이 울타리 안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이 실제로는 80만~100만건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또 "성폭력 가해자의 80%가 피해자와 잘 아는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성폭력 상담 사례를 예로 들며 "이는 성폭력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관리되고 기획되는 이른바 매니지먼트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편견은 '페미니즘은 중산층 여성들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남성들도 대개는 중산층 부르주아 지식인인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진보 남성들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모택동과 맑스가 중산층 지식인이었던 것에는 시비가 안붙는데 언제나 페미니스트만 중산층 지식인인 게 시비거리가 된다고. 여기에는 여성은 '어머니'이거나 '창녀'일 뿐 지식인이나 중산층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남성이 성별제도(gender)로 인해 차별받거나 억압받는 경우는 없을까.

정희진씨는 "흑인이 당하는 억압과 백인이 당하는 억압이 같을 수 없다"고 비유하며 "더욱이 남성이 억압받는 것은 젠더(gender) 때문이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그는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언어만 알면 되지만 식민주의는 자신의 언어와 제국주의 언어 둘 다를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남성을 제국주의에 빗대기도 했다.

가정과 사회를 서로 배타적인 공간으로 바라보는 가부장제 의식 때문에 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질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성폭력 담론 또한 여성의 인권보다는 부계 가족 보호라는 남성 공동체의 이해에 더 기능적이라고 지적했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존재성을 몸으로 환원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의 정체성(계급)은 몸의 기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반면 여성의 계급성은 소유한 재산이나 능력보다는 얼마나 예쁘고 젊으냐에 따라 좌우된다."

사회는 여성의 몸이 어떻게 보여져야 하는지에 집착하고 그 책임을 여성에게 묻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보는 주체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상으로만 존재한다고.

남성의 계급성은 대체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지만 여성의 정체성은 많은 경우 몸의 상태에 따라 주어지는 게 사실이다.

이는 오랫동안 유지돼 온 가부장제의 전통과 남성 권력이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익숙해진 우리 사회의 관습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석희열 기자 shyeol@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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