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유류피해 투쟁위원회 소속 주민 5000여 명은 이날 대형 버스 120여 대에 나눠 타고 서울로 올라와 조속한 특별법 제정과 삼성의 무한책임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오후 1시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삼성중공업의 해상크레인과 유조선 충돌로 야기된 기름 유출 사고로 태안의 7만 군민은 시름과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며 "가해기업 삼성은 이번 사고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집회는 초반부터 격렬해지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집회장에서는 "우리가 끝이면 너희도 끝이다"라고 적힌 대형 걸개그림이 나부끼며 집회의 성격을 알렸고 참가자들은 내내 "삼성 타도"를 외쳤다.
주민들은 특히 삼성중공업 해상크레인 예인선과 유조선 모형으로 충돌 장면을 재연한 뒤 사고 가해자인 예인선을 도끼로 찍고 큰 망치로 내리쳤다. 이어 삼성전자에서 만든 텔레비전과 냉장고 모형물들이 줄줄이 쇠망치에 산산조각나며 내동댕이쳐졌다.
이들은 집회를 마친 뒤 오후 2시40분께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을 향해 행진하려다 출동한 경찰 60개 중대 6000여 명에 가로막혀 서울역 고가차도 아래서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으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30여 분간의 대치 끝에 경찰은 주최 쪽의 요구로 주민 대표 100명이 삼성 본관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삼성 본관 앞에 도착한 주민 대표들은 경찰의 중재로 삼성 쪽과 협상을 요구했으나 삼성 관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주민들은 본관 진입을 시도하며 경찰과 거칠게 몸싸움을 벌였다.이들은 약식집회를 통해 "이번 사태로 희망을 잃어버린 세 분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삼성은 요식적인 행위로 7만 태안 군민을 속이려는 술책만 일삼고 있다"며 이건희 회장의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낭독했다.
삼성중공업 정원태 상무가 본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분이 지난 오후 3시17분께.
정 상무는 "여러분을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며 머리를 숙였다. 이어 "태안 주민 여러분의 생활 터전이 하루 빨리 회복되고 서해 연안의 생태계 복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민들의 생계 지원이나 피해 배상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게 사과냐" "피해 주민들에 대한 배상 책임은 왜 얘기 안하느냐" "아직도 정신 못차린 모양이군" 등의 거친 말을 쏟아내며 분통을 터뜨렸다. 흥분한 일부 주민들은 태안에서 가져온 생선을 집어던지며 거세게 항의했다.
어민 김기홍(54)씨는 "이게 세계 초일류 기업의 태도냐. 삼성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법부터 배워야 되겠다"며 혀를 찼다.유운환(63·태안군 모항)씨도 "태안 군민과 국민에게 사과하고 피해에 대해 배상만 해주면 왜 여기까지 오겠느냐"면서 "우리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진정한 사과와 정당한 피해 배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중공업 정 상무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5분여 만에 비상구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주민들은 본관 진입을 시도하다 오후 4시께 돌아갔다.
한편 민주노동당은 24일 피해액 선지급과 주민 생계 지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태안 피해주민 지원 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석희열 기자·이성훈 기자 shyeol@daili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