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울 때, 비서는 울 수 없습니다"
상태바
"모두가 울 때, 비서는 울 수 없습니다"
  • 데일리중앙 기자
  • 승인 2011.05.06 14: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마음 속의 대통령... 문용욱 노무현 대통령 부속실장

2011년 5월. 드디어 노란가게가 문을 엽니다.
2009년 5월 23일 새벽 5시.

대통령님의 헛기침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사저가 아니라 저의 집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베란다도 나가보고 현관문 앞도 살펴보다가 참, 이 시간에 여기에 오실리가 없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누웠습니다.

7시께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세영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사고에 경험이 많은 경호본부장을 쳐다보았습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눈물이 흘렀습니다. 순간 저의 마음이 외쳤습니다. '너는 수행비서다.'

이 분을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 이를 악물었습니다.

1992년 8월 15일 여의도 노무현후원회 사무실.

학교선배의 부탁으로 후원회 사무를 보고 있는데 당시 우리 사이에 대장이라고 불리던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오셨습니다. 첫 만남이었습니다. 저를 쳐다보시더니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곤 추천한 학교 선배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뭐 시키려고 저런 뚱한 친구를 뽑았소?"

2009년 5월 26일.

강금원 회장께서 감옥에서 보석으로 풀려나오자마자 전화를 했습니다. 서거 5일 전에 대통령님을 대신해서 면회 갔을 때 자기가 나갈 때까지 잘 모셔달라고 하시면서 우시던 바로 그 분의 전화였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 잘못입니다."란 말이 울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빈방을 찾아 한나절을 울었습니다.

2002년 국민경선.

수행비서가 되었습니다. 조수석에 타는데 당시 노무현 후보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기 말고 뒷좌석 내 옆에 타소. 나는 지시받는 비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같이 의논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한 것이오."

2009년 5월 29일.

광화문 장례식장에서 연화장까지 가는 길 , 길가의 모든 이들이 울었습니다. 하지만 유족을 수행해야 했던 저는 울 권리가 없었습니다. 비서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화장장에 유족들을 들여보내고 저는 화장장 바깥 모퉁이에서 저 방식으로 대통령님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너는 수행비서다.' 그 분이 누울 자리를 준비해야 한다.

2004년 1월.

국정상황실 행정관으로 있는 저를 대통령님께서 불렀습니다. "자네 집이 어딘가?" "네, 일산입니다." "청와대 주위로 이사를 왔으면 좋겠네." 그 말씀이 곧 부속실 발령이었습니다.

2010년 5월 23일 1주기 추모식.

하루 종일 비가 왔습니다. 추모객의 눈물과 비. 그날 비는 짠맛이 났습니다. 하지만 저로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묘역이 완공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이제 뭘 하지? 대학 졸업하자마자부터 17년, 그 분을 수행하는 것 외에는 배운 것도 없습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그 분의 말씀을 수행하자.

2007년 4월 대통령 1호기 안.

행사일정 관련 자료는 너무 빨리 드려도 너무 늦게 드려도 안됩니다. 행사 20분 전이 가장 적당합니다. 주무시는 대통령님을 깨워서 자료를 드렸더니 자료는 보지 않으시고 저의 얼굴을 애잔한 표정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문 실장... 고맙네."

2011년 5월. 드디어 노란가게가 문을 엽니다.

스님들이 울력을 하듯이, 수사들이 각자의 기술을 연마하듯이, 후원에 만 의존하는 재단이 아니라 땀 흘려 번 돈으로 운영되는 재단을 만들기 위해 문을 엽니다. 그 돈으로 그 분의 말씀을 수행하기 위해 문을 엽니다.

데일리중앙 기자 webmaster@dailiang.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