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참여정부'4%대 저(?)성장' 진짜 이유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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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참여정부'4%대 저(?)성장' 진짜 이유는(상)
  • 이정우 기자
  • 승인 2015.01.1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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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직전 벤처·카드·부동산 '3대 거품' 한꺼번에 붕괴된 탓
경제성장·개방(FTA)·금융·부동산 등에 관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임기 중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보수진영과 일부 언론은 '경제실패' '경제파탄'이란 극단적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참여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정말 실패한 정책인가? 지난 정부 경제정책의 공과 과를 정확하고 냉정하게 따져보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한국 경제와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미래연 웹사이트에 연재되고 있는 참여정부의 경제철학을 되짚어보는 이정우 경북대 교수의 칼럼 전문을 미래연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이정우 교수는 참여정부 시절 정책실장·정책기획위원장 등을 지냈다. - 편집자

우선 대내적으로 가계대출 증가와 신용카드 남발에 따른 신용불량자 급증으로 금융시장에 위기감이 커져갔다. 부동산시장 역시 이전 정권의 경기 활성화를 위한 각종 규제완화 조치와 저금리정책으로 인해 넘치는 자금이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면서 주택가격이 급등하는 불안한 양상을 보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10년은 그 전 시기에 비해 확실히 저성장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양극화가 심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두 정권에서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복지제도를 확장하고 복지예산을 크게 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극화 추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저조한 경제성적이 국민들을 실망시켰고, 보수집단으로 하여금 해방후 최초의 민주개혁정부 10년의 실적을 폄하하게 만든 근거를 제공했다. 2007년 대선 기간에는 심지어 '잃어버린 10년'이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 시기에 저성장과 양극화가 심화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두 정권의 정책 실패 때문이라기보다는 1997년의 외환위기가 가져온 경기 침체와 구조조정, 대량실업,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가 근본 원인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두 차례의 진보정권은 하필이면 집권시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본다면 IMF 사태와 같은 국난이 아니었다면 과연 한국 최초의 진보정권 출현이 애당초 가능하기나 했겠나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그런 점에서 IMF 사태로 촉발된 유례없는 위기 상황은 한편으로는 장기집권해온 보수정당에 대한 실망 때문에 진보개혁세력의 집권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음과 동시에 진보정권이 집권 이후 스스로 좋은 경제적 성과를 얻기 어려운 요인이기도 했다. 이것이 진보개혁정권 10년의 근본적 한계이자 배경 요인이다.

보수정권이 불러온 IMF환란으로 저성장·양극화... 진보정권의 한계로 작용

김대중 정부 시기 평균 성장률은 4.2%, 참여정부는 4.3%로서 둘 다 과거 독재시절의 고성장에 비하면 확실히 저성장이다. 게다가 불경기가 심할 때는 실업자가 늘어나고, 소득분배가 악화하며 빈곤은 증가하므로 소득분배 상황도 좋을 수가 없었다. 특히 한국처럼 영세 자영업자의 비중이 높은 나라에서는 내수 경기의 부진은 바로 양극화 심화로 연결된다. 김대중 정부 초기와 참여정부 5년 내내 이 문제로 시달렸다고 볼 수 있다.

참여정부 5년 간은 그 전에 형성됐던 거품이 꺼지는 시기와 일치했기 때문에 참여정부는 5년 내내 저성장, 불경기, 양극화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참여정부 초기의 북핵 위기, 이라크 파병 논란 등 외적 요인도 한국 경제의 중요한 제약요인이었다. 2008년 국정홍보처에서 발간한 <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경제편)은 참여정부 출범 초기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 당시 국내 경제여건은 이전 정권의 누적된 경제적 위기요인과 국외의 정치경제적 불안요인이 겹쳐지면서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5년간 정부와 국민의 노력으로 1997년부터 시작된 외환위기는 어느 정도 극복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생긴 후유증과 경제의 거품으로 인해 경제 전체의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우선 대내적으로 가계대출 증가와 신용카드 남발에 따른 신용불량자 급증으로 금융시장에 위기감이 커져갔다. 부동산시장 역시 이전 정권의 경기 활성화를 위한 각종 규제완화 조치와 저금리정책으로 인해 넘치는 자금이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면서 주택가격이 급등하는 불안한 양상을 보였다."(p. 16)

여기서 말하는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의 거품과 후유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벤처거품, 카드거품, 부동산거품이란 3대 거품을 의미하는데, 이 문제는 워낙 중요하므로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민의정부 '벤처광풍' 거품 꺼지며 참여정부 시작부터 그늘 남겨

▲ 이정우 경북대 교수
ⓒ 데일리중앙
먼저 벤처거품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지식기반 경제'와 '정보 대국'을 강조했다. 그는 1998년 2월 취임사에서 "세계는 지금 유형의 자원이 경제 발전의 요소였던 산업사회로부터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며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 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정보화, 지식시대 도래라고 하는 세계사적 흐름을 잘 파악한 올바른 방향이었다. 미국에서도 바로 이 시기에 정보통신 산업을 주축으로 소위 '신경제'가 일어나 경제성장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므로 김대중 정부의 큰 정책방향은 지극히 옳았으나 각론에 들어가서 구체적 정책수단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5년 간 벤처기업 2만 개 창업 지원, 9000억원의 벤처 지원자금 마련, 창업 벤처기업마다 각각 3억원씩 지원 등 각종 벤처 육성정책을 쏟아냈다.

1998년 5월 '벤처산업 활성화를 위한 규제개혁 시안'을 내놓았고, 6월에는 재정경제부가 '코스닥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집권 초부터 큰 금액의 벤처 지원자금을 뿌렸다.

대통령이 주도하는 벤처 육성 붐을 타고 벤처기업은 2001년에 GDP의 3%(16조원), 총수출의 4%(56억 달러), 총고용의 2%(34만 명)를 차지하는 등 급성장했다. 벤처 창업도 봇물을 이뤘다.

벤처기업 수는 중소기업청이 벤처기업 인증 업무를 시작한 1998년 2000여 개에서 2001년 말까지 매달 수백개씩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벤처 기업의 숫자는 1998년 2000여 개에서 매년 급증해서 2001년 봄에는 1만1000개를 돌파해서 정점에 도달했다.

김대중 정부의 벤처 정책은 금융과 산업 영역뿐 아니라 온 나라를 전방위적으로 흔들어놓았다. 당시 상황은 한마디로 '벤처 공화국'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벤처 창업과 취업에 나섰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벤처 정신'이 외환위기의 암울함 속에서 활력소로 등장한 것은 인정할 만하다.

테헤란 밸리를 중심으로 '벤처 대박' 신화가 화젯거리로 등장하면서 너도나도 떼돈을 벌겠다며 벤처 투자에 뛰어들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묻지마 투자'였다. 벤처 육성정책이 과도한 나머지 '벤처 투자 광풍'으로 빗나가 버렸다.

당시 벤처 육성자금은 눈먼 돈으로 치부되어 누구라도 벤처 기업을 한다고만 하면 손쉽게 쥘 수 있는 공짜 돈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당시 시중에서는 '요즘 벤처 안 하면 바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벤처 육성자금은 방만하게 지출, 관리되고 있었다.

▲ 국민의 정부 때와 참여정부 초기 국내 벤처기업 수. 1999년 4934개에서 2001년 1만1392개로 크게 늘었다가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2002년 8000여 개, 2001년 7000여 개로 급감했다. (자료=통계청, 단위: 개)
ⓒ 데일리중앙
이런 환경에서 벤처 투자는 비정상적 과열 양상을 보이다가 비정상적으로 갑자기 거품이 꺼지고 말았다.

벤처 거품은 2001년 봄을 정점으로 급속히 꺼졌고, 정치권력과 벤처 기업인 사이의 유착관계(이른바 벤처 게이트)가 잇따라 드러났다. 국민의 정부에서 벤처 전도사 역할을 했던 권력 실세 권노갑 씨의 구속 이후 벤처 열기는 급작스레 식어버리고, 거품은 붕괴를 맞게 되었다.

외환위기는 국가적 위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민의 정부로 하여금 한국 경제의 틀을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조급한 벤처 육성정책에 편승해 대다수 벤처기업들은 손쉽게 투자를 하거나 코스닥에서 큰돈을 벌려고 했고, 결국 도전과 패기로 상징되는 역동적 벤처 정신은 오히려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벤처 거품은 한국경제에 반짝 고성장을 가져왔지만 그보다 훨씬 긴 과잉투자, 불황, 저성장의 그늘을 남겼다.
 
내수 살리기용 신용카드 남발로 생긴 거품, 참여정부 고스란히 떠안아

이 시기 또 하나의 큰 거품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카드 문제였다. 국민의 정부는 소비지출을 늘려 침체된 내수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신용카드 확대 정책을 채택했다. 급기야 길거리에서 대학생들에게 즉석에서 신용카드를 발급해준다는 기상천외의 광경이 벌어졌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1999년부터 현금서비스 사용한도를 폐지하면서 카드 사용액이 급증했다. 2000년 1월에는 신용카드 영수증 복권제도를 실시해 일반인들의 신용카드 사용심리를 자극했으며, 법인신용카드의 사용범위도 대폭 확대했다. 2001년에는 소득공제시 신용카드 사용액의 공제폭을 대폭 늘렸다.

이와 같은 신용카드 정책으로 유동성 제약이 크게 완화됨에 따라 소비자들의 신용카드 이용금액이 급증하여 소비지출이 확대되었다. 게다가 정부는 경기 진작을 목적으로 2001년 말부터 특별소비세를 인하했기 때문에 소비재 구입이 증가하여 할부금융회사의 할부금융대출 및 판매신용이 크게 증가했다.

한국에서 1999년말 4000만장 정도 존재하던 신용카드는 정부의 경기부양 의지와 신용카드사들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에 힘입어 2002년에는 1억 장 이상으로 급증하여 경제활동인구 1인당 평균 4장 이상의 신용카드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용카드 이용액은 1999년 말에 비해 6배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 덕분에 신용카드사들은 2000년부터 흑자를 누리게 되었다. 이 시기 카드 사용에 의한 소비 진작이 경기 회복에 기여한 것은 틀림없는 없는 사실이다. 2000년 이후 2002년 3분기까지 소비지출 성장률이 실질국민총소득(GNI) 성장률을 상회하여, 소비지출이 단기적인 경기회복을 주도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무차별적인 카드 부채에 의한 소비 증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부작용을 가져왔다. 참여정부 첫 해인 2003년에 신용카드사들은 2000년부터 쌓아왔던 흑자를 모두 잃고도 남는 10조원 이상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고, 카드 사용이 급감해서 경기후퇴에 큰 몫을 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의 카드 남발과 이에 따른 신용카드 부채는 그 뒤 수년간 우리 경제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98년 이후 신용카드 매수와 이용액의 증가세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것은 분명 내수 경기 진작에 플러스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나 남해의 거품 사건에서 보듯이 거품 경제의 특징은 그것이 무한정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2002년을 정점으로 거품은 급속히 소멸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서 2003년 한 해 동안 신용카드 이용액의 감소분은 무려 142조원에 달해 당시 국내총생산의 18.5%, 민간 소비지출의 33.8%에 달했다. 이것 하나만 해도 큰 불황을 초래하고도 남을 엄청난 규모였다.

▲ 자료=임대봉, 이병완, 2005.
ⓒ 데일리중앙
2000~2002년 3년 간 한국의 신용카드 이용액의 약진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기현상이다. 그러나 빚잔치가 오래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 금액은 2003년 이후 급감하여 과거 패턴으로 되돌아갔고, 거품이 꺼지는 과정에서 국내경기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거품이 꺼지는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갔고, 그 책임은 참여정부의 몫이 되었다.

'화는 혼자 오지 않는다'(禍不單行)는 말이 있듯이 거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 하나의 거대한 거품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역대 정부에서 경기가 나쁠 때마다 꺼내 쓰던 전가의 보도인 부동산경기 부양의 유혹이 찾아왔다.

이정우 기자 shyeol@daili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