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월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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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월광주
  • 석희열 기자
  • 승인 2016.05.18 0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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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봄, 쿠데타와 학살... 그리고 저항
▲ 1980년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뒤 총검으로 완전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시내로 시가행진하며 진출하고 있다. '피의 광주'를 예고하고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 데일리중앙

[데일리중앙 석희열 기자] 1980년 5월 17일 밤 12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총검과 곤봉으로 완전 무장한 특전사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시내로 시가행진하며 진출했다.

민주화의 봄이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완전히 제압당하며 '피의 광주'를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5월 18일(일요일, 맑음) 오전 10시 전남대 앞. "계엄해제하라"고 외치는 학생들과 공수부대의 첫 대치가 벌어졌다.

5월 19일(월요일, 오후부터 비) 오전 10시 금남로, 수만명의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대치했다. 터질 듯한 긴장감이 흘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긴 침묵을 깨고 누군가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쳤다. 동시에 '탕, 탕탕탕...'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피의 광주가 시작된 것이다.

민주화의 봄. 쿠데타와 학살. 그리고 저항···. 한국의 80년은 그렇게 시작됐고 어느새 '오월광주'는 한국 민주화의 정신적 고향이 되어 있었다.

5월광주. 언제나 우리들 가슴 속에서 신열을 앓고 있었으며 살아 숨뛰는 맥박으로 자리했다.

핏빛 진달래와 함께 찾아온 반도의 5월은 언제나 그렇게 우리에게 원죄의 무게를 더해주었고 눈물과 분노, 새로운 결의와 다짐들 그리고 투쟁과 운동이 늘 함께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캠퍼스의 5월 또한 언제나 접동새의 울음소리와 함께 찾아 왔다. 그때 우리는 어느 누구도 5월을 서정으로 노래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84년 이후 전국의 대학가가 들끓기 시작하고 캠퍼스가 온통 몸살을 앓으면서 드디어 '광주'가 우리 앞에 신열을 토해내며 그 나신을 드러냈다. 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대학가의 해오름식은 이후 '6월항쟁'으로 이어졌고 캠퍼스는 단 하루도 영일이 없었다.

그렇게 광주는 우리들에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으며 스스로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멍에였다. 어느 누구도 광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오직 광주만이 우리들의 영감과 사상적 전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듯 민주화 여정은 거칠었고 힘겨웠으며 이따금 몸져 누웠다.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과 5월. '5.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고 광주 망월묘역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방송3사 합동 실황 중계방송이 열렸다.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 5.18광주민중항쟁이 정부행사로 승격됐다. 이후 5.18 공식 기념식 본 행사 때마다 민중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됐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2004년 5월 18일 광주 망월동 5.18민주열사묘역에서 열린 5.18 24돌 기념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대통령은 이 땅의 참민주를 위해 먼저 가신 임들을 위로했다.

"피 묻은 깃발이 올랐다/ 들판에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느냐/ 이 잔인한 군인들의 포효가/ 그들이 바로 우리 곁에 왔다/ 너희 조국, 너희 아들들의 목을 따기 위해서//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너희의 부대를 만들어라 나가자, 나가자!/ 그들의 불결한 피를 우리 들판에 물처럼 흐르게 하자"

그러나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는 출범 이듬해인 2009년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본 행사에서 내쳤다. 역사와 상식을 뒤엎은 것이다.

이후 5.18을 앞두고 해마다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과 제창을 둘러싸고 국론이 둘로 갈라져 논란이 격화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거부 이유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국론분열'을 언급하고 있지만 1980년 이후 28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은 2009년 이후 생겼다.

"피 묻은 깃발이 올랐다/ 들판에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느냐/ 이 잔인한 군인들의 포효가/ 그들이 바로 우리 곁에 왔다/ 너희 조국, 너희 아들들의 목을 따기 위해서//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너희의 부대를 만들어라 나가자, 나가자!/ 그들의 불결한 피를 우리 들판에 물처럼 흐르게 하자"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이즈'다.

우리의 애국가에 해당하는 이 노래는 과거에 프랑스 민주화운동 당시에 시민들이 불렀던 노래가 국가로 승격된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매우 전투적인 가사와 가락의 이 국가를 부를 때 국기를 흔들고 주먹을 휘두르며 부른다. 그러나 이 노래로 인해 국론이 분열됐다는 소리는 들어본 사람이 없다.

▲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의 발포로 광주시민들이 무참히 쓰러져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 데일리중앙

'임을 위한 행진곡'이 오월광주의 상징적인 노래라는 것은 국민의 상식이다.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국민통합'이 결국 갈등과 반목의 '국민 분리'로 귀결되고 있는 셈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말하는 '국민통합'이 누구를 통합겠다는 것인지 답해야 할 것 같다.

석희열 기자 shyeol@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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